공간과 시간을 다듬는 일

차경선 | 리퀴드랩, HNAT 대표


9월이면 헤이그라운드의 두 번째 지점인 서울숲점이 오픈한다. 서울숲점 10층에는 컨시어지 바 컨셉의 Here Now and Then이 입점 예정이다. Here Now and Then에서 어떤 일을 벌일지 열심히 고민중인 차경선 리퀴드랩 대표를 만났다.


지금 하고 계신 일 간단히 소개 부탁 드려요.

2013년부터 성수동에서 리퀴드랩이라는 맥주집을 운영하고 있어요. 헤이그라운드를 운영하는 루트임팩트와의 인연으로, 9월부터는 헤이그라운드 서울숲점에서 Here Now and Then이라는 이름으로 라운지바도 운영할 예정입니다.


조경을 전공하셨다고 들었어요. 전공을 선택하신 과정이 궁금해요.

어려서부터 회사원이 아닌 다른 것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어요. 고등학생 때 이공계 전공 중에서 큰 관심 없는 분야를 지우다 보니, 건축이 남더라고요. 그러다 고3때 조경이라는 분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원래 도시를 여행하고 공원을 산책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어서 조경을 전공하고 후에 도시공학을 복수전공했어요.


저한테는 생소한 전공인데요. 어떤 것들을 배우나요?

가장 쉽게 상상하려면 공원 디자인을 생각하면 돼요. 공원을 그냥 만들기만 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공원의 프로그램들도 함께 생각해야 하잖아요. 공간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함께 고민할 수 있도록 배워요. 조경 디자인, 도시 설계, 생태학, 도시재생, 커뮤니티에 대한 내용들도 조금씩 다뤄요. 그래서 사실 학부에서 전문성을 갖기는 어려워서 대학원 진학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저로서는 조경이라는 건 만들고 나서도 그 모습이 시간과 함께 변해가는 것이 매력적이었어요. 건축과는 조금 다른 포인트이기도 하고요.


전공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네, 사실 저는 전공에서 배우는 것들을 정말 좋아했어요. 동기 30명 중에서 1명만 조경을 끝까지 한다면 다들 저일거라고 얘기할 정도로요. 그런데 제가 탈조경(조경 관련 진로에서 벗어나는 것)을 했죠. (웃음) 졸업작품을 하면서 스스로에게 실망을 많이 했어요. 그간 봐왔던 선배들의 졸업작품에 못 미치더라고요. 제가 잘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어요. 그리고 조경이나 도시는 워낙 큰 스케일을 다루다 보니 역설적으로 제가 실제로 구현할 기회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회의가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마지막 학기에 탈조경을 결심했어요.


갑자기 삶의 방향을 고민해야 되는 시기였겠어요.

네, 그 동안은 조경 말고 다른 걸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갑자기 고민을 하게 됐죠. 도시들을 많이 볼 수 있을 것 같아서 승무원 준비도 했고, 동시에 부동산 자산운용사에서도 입사 제안을 받았어요. 최종적으로는 자산운용사에서 일하는 것으로 결정했어요. 조경이라는 전공을 좀 더 살릴 수 있었고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사무실이 좋기도 했고요. (웃음) 그런데 둘 중 어떤 걸 하더라도 2-3년 하고 나와서 제 걸 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자산운용사에서는 1년 정도 일하고 나왔죠.


1년이면 원래 계획보다는 짧았네요?

굉장히 안정적인 분위기의 회사였어요. 투자도 매우 안전한 곳만 하고, 부동산이다 보니 한 번 하면 회수하는 시점까지가 매우 길어요. 그 사이에는 새로운 일을 만들거나 하는 경우가 잘 없어요. 여기 계속 있으면 안주하고 싶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리퀴드랩을 기획하고 나오신 건가요?

그냥 나왔어요. 안전망이 있으니까 간절해지지가 않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회사를 다니면서도 충분히 고민도 하고 기획도 할 수 있었는데 시작이 잘 안 됐어요. 그 땐 스물여섯이었으니까 뭘 하다가 안 돼도 다시 기회는 있겠다 싶었어요.


그럼 퇴사하고 다시 또 고민의 시기를 보내셨겠네요.

그 땐 막무가내였어요. 뭘 하고 싶다는 뚜렷한 생각도 없었고요. 저는 사실 직업이나 생업과 자아실현을 연관지어 생각하지 않는 쪽이라, 내가 최소 얼마를 벌면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먼저 했어요. 월 90만원이면 살 수는 있겠더라고요. 최소 월 90만원을 벌 수 있는 일로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2013년이면 성수동이 아직 지금처럼 주목받기 전이잖아요. 어떻게 성수동에서 가게를 열게 되셨어요?

제가 아는 동네가 청량리 쪽 학교 근처 정도였어요. 그리고 그 때 살던 곳이 성수동이었죠. 잘 모르는 곳을 분석하는 것보다는 그냥 내가 사는 동네에서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리퀴드랩 맞은 편에 있는 카페에서 알바를 했는데, 당시에는 이 자리가 미용원이었어요. 골목은 다 요식업인데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부동산 가서 물었더니 안 그래도 며칠 전에 매물로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이번에도 우선 계약부터 하고 여기서 뭘 할지 고민했어요. (웃음) 맥주집으로 정하고 이전 회사 분들을 초대했는데, ‘그렇게 맥주 좋아하더니 결국 맥주를 파는구나' 하시더라고요.


처음엔 커피도 판매하셨다고 들었는데, 중단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직접적으로는 동생과 함께 에어비앤비 운영을 하게 되면서인데요. 리퀴드랩 이후에 뭘 할지 고민하는 시간도 필요했어요. 낮에 커피, 밤에 맥주를 다 하려면 12-13시간 계속 가게에만 있어야 하는데 답답하기도 했고요. 매출은 커피 쪽이 잘 나왔는데, 제가 계속 음료 파는 일만 하려는 것은 아니니까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맥주에만 집중하고 다른 걸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어요.


리퀴드랩이라는 이름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주류로 다양한 실험을 해 보려고 했던 초기의 결심이 담겨 있어요. 가게 초반엔 음료 메뉴만도 50가지가 넘었어요. 손님의 레시피를 받아서 팔고 수익을 공유하는 아이디어도 생각했었고요. 그런데 무작정 메뉴가 많은 것이 손님들에게 좋은 것이 아니더라고요. 재고 관리가 잘 되어야 품질관리가 되니까요. 이름의 의미대로 운영은 못하고 있지만, 애정이 가는 이름이에요.


그 무렵 생기기 시작한 성수동의 다른 젊은 가게들과 소통도 있을 것 같아요. 

저희끼리는 1세대, 1.5세대라고 부르는데요. 2013년 무렵 생긴 가게들이에요. 그땐 작은 규모의 가게들이 많아서 점주끼리 모여서 밥도 먹고, 새로 가게가 생기면 같이 놀러 가 보기도 하고 했어요. 그때가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어느 시점부터는 가서 인사하기 민망한 규모의 가게들이 생기더라고요. 처음에 같이 다니던 분들 중 가게를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된 분들도 많고요.


리퀴드랩 열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있나요?

성수동이 내 동네같다고 느낄 때요. 제가 초등학교, 중학교만 총 7곳을 다녔거든요. 이사도 많이 하고 해외에 머문 적도 있고요. 결국 서울에서 제일 오래 산 건데, 이상하게 ‘서울 사람이다'라는 느낌은 안 들었어요. 그런데 리퀴드랩 하면서 단골도 생기고 친구도 생기고 동네 돌아다니면서 가게들도 알게 됐어요. 여기가 내 동네구나, 하는 실감이 있어요 이젠.


반대로 괜히 했다고 느낄 때도 있나요?

그런 적은 없어요. 오히려 앞으로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어요. 첫 가게라 애정이 많은 것 같아요. (웃음) 


9월 오픈 예정인 헤이그라운드 2호점, 서울숲점에 입주하기로 하셨어요. 제안받았을 때 어떠셨어요?

우선 재미있을 것 같았어요. 리퀴드랩 하면서 하게 된 재미있었던 일 중 많은 부분이 루트임팩트 사람들과 관련이 있었거든요. 한 날 최지훈 디렉터(헤이그라운드 사업총괄)가 술 마시다가 제안을 하더라고요. 저도 장사를 하고 있으니까, 그때 듣고 돈은 안 되겠구나 싶었어요. (웃음) 그런데 재미는 있겠더라고요.
성수동에 오기 전에는 NGO가 있다는 정도만 알았지 소셜 벤처라는 개념은 아예 몰랐는데요. 여기서 가게하면서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언젠가는 이왕이면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도 하게 됐고요. 헤이그라운드 2호점에 입점하면 그 생각을 구체화할 수 있는 기회들도 있지 않을까 기대도 하고 있어요. 물론 헤이그라운드 멤버들이 필요로 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가장 우선이고요.


2호점에 오픈하는 공간은 Here Now and Then이라는 이름을 지으셨어요. 어떤 의미인가요?

저는 결국 공간과 시간에 관심이 많은 사람인 것 같아요. 공간이라는 하드웨어와, 그 안에서 흐르는 시간이라는 소프트웨어요. 그 관심을 잘 담은 이름인 것 같아요. 아주 뚜렷하게 정의는 아직 못 하겠어요. 다만 저는 ‘미래에 잘 살기 위해 오늘을 견디자'는 주의는 아니에요. 지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쪽이고요. 그리고 지금 가장 재미있는 시간이 흐를 것 같은 공간을 계속 만들어 가고 싶은 것 같아요. 


Here Now and Then은 어떤 시간이 흐르는 공간이 될까요?

헤이그라운드의 컨시어지 라운지바 같이 되면 좋겠어요. 커뮤니티 매니저의 영역이 아닌 무언가 정보가 필요할 때, 편하게 들러서 물어볼 수 있는 공간이면 좋을 것 같아요. 헤이그라운드 전체의 총무팀처럼요. (웃음) 제가 가진 정보나 네트워크들을 잘 활용하면 도울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여행을 워낙 좋아하니 휴가 계획을 같이 얘기할 수도 있고요. 파티나 공연 같은 다양한 프로그램들도 기획하고 있어요.


직업과 자아실현은 별개라고 하셨는데, 자아실현은 어떻게 하세요?

아직 꿈이랄 만한 것은 없어요. 사실 있어야 되나 싶기도 하고요. 목표 정도는 있는데, 최대한 많은 도시를 가 보는 것과 백패커들의 게스트하우스를 만들어 보는 것이에요.
여행은 늘 1순위인 것 같아요. 다른 곳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보고, 지금껏 보지 못한 콘텍스트나 익숙지 않은 모양의 공간들을 보는 것이 좋아요.
백패커들의 게스트하우스는 태국에 레퍼런스로 삼은 곳이 있어요. 객실과 루프탑과 라운지가 있는 곳인데 세계에서 배낭여행객들이 모여들어요. 리퀴드랩과 에어비앤비를 하는 경험들을 통해 조금씩 역량을 쌓고 있는 것 같아요.


스트레스 해소는 어떻게 하시나요?

제가 청소하는 것을 좋아해요. 그래서 에어비앤비 방 정리를 하는 건 일 같지가 않아요. (웃음) 물론 같은 질문에 계속 같은 답을 해야 하는 것은 조금 힘든데, 체크아웃 후에 방 청소하면 스트레스가 풀려요. 동생과 청소를 나눠서 하는데 가끔은 제가 동생 청소를 뺏어서 할 때도 있어요. 청소는 들인 시간만큼 성과가 바로 보이잖아요.


일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나요?

제가 재미있는 것이 중요해요. 결국 제가 하는 일은 서비스업이잖아요. 제가 재미있어야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고객들이 이 공간에서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에 분명 영향을 줍니다. 제가 재미있어서 그 공간을 더 발전시키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저에겐 중요해요.


일하면서 참고한 책이 있나요?

<The Beer : 맥주 스타일 사전>이라는 책이에요. 리퀴드랩에서 일하게 되면 누구나 한 번씩 보게끔 해요. 간단한 테스트도 하고요. 맥주에 대한 입문 지식 정도를 익혀둘 수 있어서 지금도 활용해요.


가게 창업을 고민하는 분들께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

하지 않으시면 좋겠다는 얘기를 제일 많이 하긴 하는데요. (웃음) 지인들한테 질문을 많이 받긴 해요. 회사 다니기가 너무 싫다면서 그냥 푸념처럼 얘기하는 경우도 많고요.
정말 하려는 분들은, 노동의 대가 측면에서 꼭 한 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월급 받으면서 일하면 내가 내 시간과 노력을 들여 노동을 투입하면 보상을 받는게 너무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자영업은 그렇지 않아요. 하루 20시간을 들여서 몇 년 해도 마이너스가 될 수도 있는 것이 너무 당연하고 빈번해요. 그걸 잘 인지하고 시작하시면 좋겠어요.


Editor 김와이 황단단 | Photo 강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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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 Hey Listen. | letter@heygroun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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